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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과 가치 투자 - 가치 투자에는 가치가 없다.

오렌지사과키위 2024. 9. 20. 18:47

널리 쓰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 생각하는 단어가 몇 가지 있습니다. 명품(名品)은 Luxury goods를 번역한 말인데, 사치품 또는 호사품의 의미를 가집니다. 한국어 위키에는 사치품으로, 중국어 위키에도 奢侈品(사치품)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일본어로는 高級ブランド(고급브랜드)로 불립니다. 요즘에는 해외 유명 브랜드라 말하기도 합니다.

마케팅 측면에서 사치품을 명품이라는 단어로 소개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치품이라 하면 떠 올릴 수 있는 부정적인 느낌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사치품을 사는 것은 왠지 껄끄럽지만, 명품을 구입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합리적인 소비로 보일 수 있습니다.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 디자인, 또는 기능이 뛰어난 제품이라는 느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명품이라는 단어가 Luxury goods의 엉뚱한 번역은 아닙니다. 사치품은 일반 상품보다 효용이 조금 더 높지만, 가격은 그 이상으로 비싼 상품을 말합니다. 품질은 좋지만 가성비는 낮은 상품입니다.

명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다 보면, 가성비가 낮은 제품이라는 본래 의미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명품 마케팅의 목표인 심리적 부담을 줄여 소비를 늘릴 수 있습니다.

백화점의 명품관을 사치품관 또는 호화품관으로 이름을 바꾸면 매출이 줄어들 것입니다. 결혼을 약속한 애인이 말합니다. "자기야, 내 생일에 사치품 가방 선물로 받고 싶어", 친구들에게 자랑을 합니다. "딸이 보너스를 받았다고 사치품 시계를 선물해 줬어. 스스로 되새깁니다. "내가 산 건 사치품이 아니야. 명품이야."

가치투자? 값어치투자?

가치투자Value investing을 번역한 단어입니다. 기본적 분석을 중심으로 기업의 적정 가격을 추정하고, 그 추정 가격과 현재 가격과의 괴리를 이용한 투자 방법입니다.

가격 또는 가치와 관련한 단어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영어의 경우 대표적으로 price, value, worth를 들 수 있습니다. price는 수치로 표시된 가격입니다.

할인 마트에서 200ml 우유 한 팩의 가격이 1,000원으로 표시되어 있으면 price는 1,000원입니다. 편의점에서 같은 우유를 사려는 사람에게는 price가 1,200원입니다. 투자자가 할인 마트에서 산 우유를 편의점에서 우유를 사려는 사람에게 팔 수 있다면, 우유의 가치는 최대 1,200원이 될 수 있습니다.

value와 worth는 가치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단어는 조금 다른 어감을 가집니다. value는 가격으로 환산될 수 있는 가치에 가깝고, worth는 가격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에 가깝습니다. 우유의 가치 1,200원은 value입니다.

두 단어는 상황에 따라 혼용될 수 있지만 아래 영어 문장을 보면 그 차이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문장에서 value와 worth 중에서 어떤 단어가 적절할까요? 출처: 토익 파트5 - worth 가치? value 가치? 무슨 차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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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문장에는 worth가 적절하고, 두 번째 문장에는 value가 적절합니다. 간단하게 본다면, 수치로 환산하기 어려운 내재적 가치에는 worth를 쓰고, 가격으로 환산 가능한 가치에는 value를 사용합니다. 참고: 가치, 값어치 영어로. 명사 worth, value 차이.

가치는 두 경우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지만, worth의 의미에 좀 더 가깝습니다. Value investing에서 value는 가격으로 환산 가능한 수치적 가치를 의미합니다. 이를 가치로 번역하면 명품의 경우처럼 오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가격으로 환산 가능한 수치적 가치를 부르는 한국어 단어는 따로 있습니다. 값어치라는 단어입니다. 출처: 가치, 값어치 [네이버 국어사전]

가치: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

값어치:
일정한 값에 해당하는 분량이나 가치.

Value investing을 번역한다면 값어치 투자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하며, 조금 더 길게 풀어쓴다면, '기본적 분석에 기반한 적정 가격 추정을 활용한 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치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기업에 대한 밸류에이션(valuation)이 필요한데, 밸류에이션이 적정 가격을 추정하는 행위입니다.

가치라는 단어로 발생할 수 있는 오해

Value investing을 가치 투자라고 번역하면, 크게 두 가지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치를 고려해서 투자했는데, 가격은 왜 오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적정 가격 추정 투자라고 하게 되면 이러한 오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남들은 적정 가격을 다르게 추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투자자들이 추정한 적정 가격들의 균형점이 현재 가격입니다. 내가 추정한 적정 가격이 시장과 다르다면, 남들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내가 잘못 추정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한국에서는 가치 투자가 통하지 않느냐느니, 기업이 주주 환원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주가가 지지부진하다느니, 기관/외국인이 시세를 조정하고 있다느니 하는 말은, 적어도 가치 투자를 한다면서 성과가 부진할 때 댈 수 있는 주요한 설명은 아닐 수 있습니다. 참고: 가치주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의 한 임원이 해당 펀드의 성과 부진한 이유로 투자자가 적기 때문이라는 비합리적인 핑계를 대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사과 한 알이 1,000원에 거래되고 있는데, 내가 파는 사과는 2,000원에 사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2,000원이 적절한 가격이라 믿는다면, 2,000원이 될 때까지 기다리면 됩니다.

갑철이네 과수원에서 떼 온 사과 한 알이 예상과는 달리 1,000원에 거래된다면, 갑철이에게 문제가 있는지, 사과를 사가는 소비자에게 문제가 있는지, 하필이면 갑철이네 사과를 떼온 나에게 문제가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오해는 가치 투자 자체가 가치가 있는 우월한 투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치 투자에 가치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기술적 분석에 기반한 매매는 비합리적인 투기 성격이 있고, 기본적 분석에 기반한 매매는 합리적인 투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투자는 이익을 얻기 위해 미래의 자산 가격을 예측하여 현재 자산 비중을 적절히 조절하는 행위입니다. 미래 가격은 기본적 분석으로도, 기술적 분석으로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금리 변동이나 수출입 동향을 고려할 수도 있고, 고점 대비 낙폭이나 거래량의 변동을 참고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늘 날씨나 동전을 던져 상승과 하락을 예측해도 됩니다. 예측 방식의 합리성과 정확도가 중요한 것이지, 특정 예측 방법이 항상 올거나 높은 수익을 거두는 것은 아닙니다.

저평가와 가치 투자

저 PER 또는 저 PBR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저평가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고, 이를 가치 투자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저 PER나 저 PBR은 지난 결산 대비 주가가 낮아진 상황일 뿐입니다.

다음 결산에 지난 결산 수준의 영업 이익을 거둔다면, 현재 저평가 상태가 맞고, 투자자는 수익을 거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왜 낮은 가격이 형성되어 저 PER, 저 PBR이 되었을까요? 수많은 투자자 중에서 나만 저평가인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일까요?

시장은 다음 결산에 이익이 낮아지거나, 상대적으로 다른 종목의 이익 증가가 더 높을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남들은 미래의 이익을 추정하고 이를 고려해서 적절하다고 판단한 가격으로 투자하고 있는데, 본인은 과거의 이익이 유지될 거라고 가정하고 투자하는 있는 것입니다.

저 PER 또는 저 PBR 종목에 투자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모든 투자는 예측이 행동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시장은 다음 결산에 이익이 낮아질 거라 예측한 것이고, 저 PER 또는 저 PBR 투자자는 이익이 유지될 거라고 예측한 것뿐입니다. 시장의 예측이 맞으면, 수익이 발생하지 않거나 손실이 발생하는 것이고, 본인의 예측이 맞으면 시장 대비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저평가는 현재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를 예측해야 저평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과거의 경험으로, 저 PER, 저 PBR 종목의 이익 하락률이 시장 예측보다 크지 않았기에 (또는 이익 상승률이 시장 예측보다 높았기에) 시장 대비 초과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저평가 지표라고 믿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리하며

사람들은 어떤 개념을 효율적으로 공유하기 위해 단어(용어)를 만듭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명품이라는 단어와 같이 본래 개념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고, 개념 일부를 누락할 수 있습니다.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로 인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Value investing을 번역한 가치 투자도 충분히 적절한 단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치라는 단어로 인해 가치 투자를 과대 평가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최근 금융감독원은 커버드콜 ETF에 사용하는 용어를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TIGER 미국배당+7%프리미엄다우존스'는 'TIGER 미국배당다우존스타겟커버드콜2호'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기사: [취재수첩] "상품명에 프리미엄 쓰지마라" 금감원의 과도한 ETF 규제

위의 기사는 업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서 불합리한 규제라고 말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성과가 좋지 못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커버드콜이라는 용어 대신, 프리미엄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사치품을 명품으로 바꾸어서 소비자에게 다시 소개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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