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투자

외화 RP는 위험한가? (증권사가 RP를 운용하는 방법)

오렌지사과키위 2024. 3. 4. 14:57

해외 주식을 매매하다 보면, 달러 예수금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작년에 산 마이크로소프트(MSFT)가 충분히 오른 듯해서 절반 정도 매도했습니다. 아직 어디에 투자할지 결정하지 못했고, 매도 대금은 달러로 들어왔습니다. 투자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예수금으로 잡혀 있습니다.

달러 예수금으로 가만히 두자니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아깝습니다. 그렇다고 은행에 달러 예금을 들자니, 계좌를 개설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이체 수수료도 부과된다고 하며, 예금 기간을 설정해야 하는 부담도 있습니다. 언제 투자 결정을 내릴지도 불확실합니다.

이리저리 물어보니, 외화 RP(Repurchase Agreements: 환조건부채권)라는 상품이 있다고 합니다. 달러를 채권에 투자해서 고정 금리를 주는 상품이라고 합니다. 상품 설명에 빨간 글씨로 아래와 같이 적혀 있습니다. 왠지 겁이 납니다. (신한투자증권 RP/외화RP안내)

금융투자상품 <RP, 외화RP> 은 예금자보호법에 따라 예금보험공사가 보호하지 않습니다.
금융투자상품 <RP, 외화RP>은 자산가격 변동, 환율 변동, 신용등급 하락 등에 따라 투자원금의 손실(0~100%)이 발생할 수 있으며, 그 손실은 투자자에게 귀속됩니다.

100%까지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하는 RP/외화RP는 위험한 상품인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객예탁금(예수금)과 예탁금 이용료

고객예탁금과 예수금은 대개의 경우 차이가 없다고 보아도 됩니다. 저도 이 두 가지의 차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아래에서는 모두 고객예탁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원화의 경우 증권사가 고객예탁금을 자동으로 굴려주는 CMA(Cash Management Account)라는 계좌가 있습니다. 증권사에 따라서는 주식 거래용 계좌와 CMA 계좌가 분리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CMA 계좌를 따로 개설해서 이체해야 합니다.

CMA 계좌에 고객예탁금을 두지 않더라도, 증권사는 고객예탁금을 알아서 굴립니다. 고객예탁금을 한국증권금융에 예치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증권사 계좌에 돈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국증권금융에 있습니다.

은행과 조금 다릅니다. 은행은 고객이 맡긴 돈을 은행에서 관리합니다. 증권사는 고객예탁금을 한국증권금융에 두어야 합니다. 증권사를 통해 주식 거래를 하지만, 주식은 한국예탁결제원에 보관하는 방식과 동일합니다.  

한국증권금융은 고객예탁금을 단기 채권에 투자합니다. 자연히 이자가 생깁니다. 발생한 이자를 증권사에 넘기면, 일부는 증권사가 가져가고, 나머지는 예탁금 이용료라는 명목으로 분기마다 고객에게 지급합니다. 아마 한 번씩 받아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탁금 이용료로 받을 수 있는 이자는 기준 금리에 비해 낮습니다. 신한투자증권의 경우 계좌 평잔이 50만원 이상인 경우 연 1.05%를 지급합니다. 글 쓰는 현재 기준 금리가 3.5%인 점을 감안하면, 이자의 2 / 3 이상을 증권사에 가져가는 셈입니다. 관련 기사: 국내 증권사 예탁금 이용료율, 외국계의 절반 [파이낸셜 뉴스]

그러니 원화의 경우 조금이라도 이자를 더 받을 수 있는 CMA 계좌를 이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CMA 계좌를 이용하기 어려운 경우, RP나 발행어음을 직접 매수하거나, 단기채권 ETF를 사놓는 방법도 있습니다. 

CMA 계좌는 고객의 편의를 위해 RP나 발행어음을 자동으로 매수하는 계좌입니다. RP나 발행어음은 예금자 보호 대상이 아닙니다. 이에 비해 고객예탁금은 예금자 보호법에 의해 5,000만원까지 보호가 됩니다.

예금자 보호

금융기관마다 개인별로 최대 5,000만원까지 보호해 주는 예금자 보호 제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해당 금융기관이 안전하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일정 금액까지는 보장해 주겠다는 의미입니다. 애초에 안전하다면 보호할 필요가 없습니다. 위험하기 때문에 보호하는 것입니다.

은행의 예금이나 증권사의 RP나 위험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고객이 맡긴 돈을 누구에겐가 빌려 주어야 이자 수익이 나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주면 떼일 위험이 발생합니다.

위험하니 보호 제도가 있고, 위험 발생 시 예금보험공사가 물어주어야 하는 손실을 제한하기 위해 한도를 설정해 놓은 것입니다.

제가 10억원의 여유 자금을 1금융권에 속하는 우량한 은행에 예금으로 예치하면 안전할까요? 5천만원까지만 예금자 보호법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투자원금의 최대 95%까지 손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은행은 이를 다르게 표현합니다. 예금자 보호법에 따라 최대 5,000만원까지 보호받을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말이지만 어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RP에는 어떤 위험이 있나?

예금이나 RP와 같은 상품은 어떤 경우에 위험이 발생할까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가 맡긴 예탁금으로 투자한 상품에 손실이 나는 경우입니다. 은행으로 따지면, 제 예금을 어느 기업에 대출해 주었는데, 그 기업이 부도가 나서 대출을 회수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해, 은행은 모든 고객의 예금을 섞어서 모든 기업에 나누어 대출합니다. 몇몇 기업의 부도는 고객 예금을 위험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증권사가 부도가 나는 경우입니다. 저축은행 부실에 의한 예금 지급 불능 사태와 같은 경우입니다.

각각의 상황에 대해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투자 상품의 손실

은행은 고객 예금을 가계 또는 기업에 대출합니다. 일반적으로 대출 금리는 예금 금리보다 높습니다. 대출로 발생한 이자로 예금 이자를 지급하고, 나머지는 은행이 가집니다.

은행은 예를 들어 3% 금리로 고객에게 돈을 빌립니다. 이를 기업에 대출해 주면서 5% 금리를 받습니다. 5% 금리 상품의 기대 수익률은 이보다 낮은 4%입니다.

5% 수익을 기대하고 대출해 주었는데, 원금만 간신히 갚는 상황이 되면 0% 수익률을 올리게 됩니다. 운이 나빠서 원금의 절반만 회수하게 되면 -50% 수익률이 되기도 합니다. 대출 금리는 5% 이지만, 평균적으로는 4% 수익률을 올리게 됩니다.

우량한 기업 위주로 대출해 준다면, 대출 금리와 기대 수익률 차이는 줄어들게 됩니다. 은행 입장에서는 건실한 삼성전자에 4.5%의 낮은 금리로 대출해 주는 것이, 중소기업에 6%의 높은 금리로 대출해 주는 것보다 더 나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동일한 기대 수익률이라면, 위험이 적게 발생할수록 (주식 투자라면 변동성이 낮을수록) 은행의 사업 존속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RP는 어디에 투자하는 상품일까요? 우량 채권에 투자하는 상품입니다. 대개는 금융채라 불리는 큰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채권입니다. 주로 1은행권 은행과 카드사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금 더 신용도가 낮은 회사채에 투자하기도 합니다.

증권사가 국채 대신 금융채에 투자하는 이유는 경쟁력 때문입니다. 국채 또는 공공기관 채권이나 지방채에 투자하면 보다 안전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은행 예금과 금리 경쟁을 하기 어렵습니다.

증권사는 고객이 계좌를 만들고 자금을 이체하도록 유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이 작은 이자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주식과 펀드를 매매하게 되고 증권사가 추가 수익을 올릴 수 있습니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수익률과 위험의 타협 지점이 금융채인 것입니다. 금융채가 부실이 난다는 이야기는 1금융권 은행이 파산 위험에 빠졌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이런 상황이면 은행의 예금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증권사의 부도

은행이 파산하면 예금을 모두 돌려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금자 보호 제도로 5,000만원까지는 보호가 되지만, 그 이상의 금액에 대해서는 소위 말하는 빚잔치를 해야 합니다.

증권사도 마찬가지일까요? 증권사는 은행과 다른 방식으로 채권을 관리합니다. 은행은 고객의 예금과 대출 모두 직접 관리합니다. 증권사는 고객의 자금(RP 매수 대금)으로 사 온 채권을 한국예탁결제원에 맡겨 둡니다. 이때 담보 비율이 105% 이상이어야 합니다.

증권사 고객들이 100억원 치 RP를 매수했다고 하겠습니다. 증권사는 고객의 자금 100억원과 증권사 자금 5억원을 더해 105억원 치 채권을 사 옵니다. 매수한 채권을 한국예탁결제원에 맡기면서, 이 채권은 고객 자금으로 구매한 것이라는 꼬리표를 붙입니다.

다음 날 고객들이 20억원 치 RP를 추가로 매수했다고 하겠습니다. 증권사는 고객의 자금 20억원과 증권사 자금 1억원을 더해 21억원 치 채권을 추가로 사 옵니다. 역시 한국예탁결제원에 보관합니다. 고객이 매수한 RP는 120억원이며, 한국예탁결제원에 맡긴 담보가 되는 채권의 평가액은 126억원입니다.

다음 날 기준 금리가 올라서 채권 가격이 1% 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채권의 평가액은 대략 125억원이 될 것입니다. 증권사는 1억원 치 채권을 추가로 사 와서 부족한 담보를 채워 넣습니다. 채권의 평가액은 다시 126억원이 됩니다.

갑자기 무슨 이유로 증권사가 파산했다고 하겠습니다. RP의 담보물인 채권도 사라질까요? 한국예탁결제원에 그대로 있습니다. 이 담보 채권을 청산한 돈을 RP 투자자들에게 나누어주게 됩니다. 형식상으로는 저축은행이 부도난 경우보다 더 안전하게 관리됩니다.

한국에 또는 전 세계에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발생하면 달라집니다. 채권 가격이 순식간에 폭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담보 채권을 모두 팔아도, 원금의 일부만 건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RP에 대한 투자 설명에 -100%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표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면, 1금융권 은행 예금은 어떻게 될까요? 마찬가지로 안전하지 않습니다. RP의 담보물인 우량 채권의 가격이 0원이 되었다는 것은, 우량 기업이 모두 파산했다는 뜻입니다.

외화 RP는 어떤가요?

외화 RP는 거래 통화만 다를 뿐 RP와 동일합니다. 한국의 경우 대량의  달러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 1금융권 은행이 발행한 은행채입니다. 그러니 원화 RP와 동일한 수준의 안전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부 증권사는 원화 CMA처럼 외화 RP 자동 매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매영업일 특정 시각이 되면, 계좌에 있는 외화 예탁금으로 RP를 자동 매수합니다. 매수한 RP는 대개 다음날 국내장 개장 전에 자동 매도됩니다. 증권사마다 자동 매수 시각과 자동 매도 여부는 다를 수 있습니다.

자동 매수 서비스 이용 시 수동 매수에 비해 조금 낮은 이율이 적용됩니다.

정리하며

RP/외화RP가 어떤 상품이며, 어떻게 운용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상품 설명에 적힌 붉은 글씨는 고객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만일에 상황에는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는 이해를 구하는 문구입니다.

하루하루 수익과 손실을 오가는 훨씬 위험한 주식에는 용감하게 투자하면서, RP/외화RP는 선뜻 손이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마도 주식은 수익을 먼저 생각하면서 투자하고, RP/외화RP는 안전을 먼저 생각하면서 투자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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